회충은 기억력이 짧아서 새로운 정보를 학습한 지 2~3시간 만에 잊어버린다. 하지만 얼음 위에 놓아두면 실온으로 돌아올 때까지 망각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생물학 논문 사전 공개 사이트인 《바이오아카이브(bioRxiv)》에 발표된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연구진의 논문을 토대로 과학전문지 《네이처》가 22일(현지시간) 보도한 내용이다.
텔아비브대의 유전학자 오데드 레차비 교수(유전학) 연구진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실의 일꾼으로 회충의 사촌인 예쁜꼬마선충(Caenorhabditis elegans)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했다. 연구진은 예쁜꼬마선충을 굶게 하면서 평소 벌레가 좋아하던 특정 냄새를 맡게 해 그 냄새를 싫어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기억력이 짧기 때문에 2시간이 지나면 예쁜꼬마선충은 부정적인 연상을 잊고 다시 그 냄새에 끌리게 된다.
연구진의 일원으로 당시 대학원생이던 다나 랜드샤프트 베를리너는 그 벌레를 얼음 위에 올려놔 봤다가 최소 16시간 동안 냄새와 관련된 기억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얼음을 치우자마 다시 ‘기억 시계’가 작동했고 3시간 만에 냄새에 대한 혐오감을 잊어버렸다.
베를리너는 예쁜꼬마선충의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방법을 확인했다. 기억 훈련을 받기 전 밤새 차가운 곳에 두면 얼음 위에 올려 놔도 평소처럼 냄새에 대한 기억을 금방 잊어버렸다. 또 리튬을 투여하면 상온에서도 기억을 오래 유지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반응의 핵심은 디아실글리세롤(diacylglycerol)이라는 신호분자일 수 있다. 디아실글리세롤은 기억과 학습과 관련된 세포 과정을 조절하고 냄새 관련 학습에 필수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진은 얼음 처방과 리튬 처방 모두에서 기억 보존이 디아실글리세롤 수치 감소와 관련돼 있음을 발견했다. 연구진은 디아실글리세롤 회로가 기억 상실을 지연시키는 데 관여한다는 점에서 ‘망각 스위치’라고 불렀다.
리튬은 디아실글리세롤의 전구체를 만드는 효소를 억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낮은 디아실글리세롤 수치와 리튬 사이의 연관성이 설명된다. 이는 양극성 장애 환자에게 리튬이 미치는 영향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레차비 교수는 설명했다.
연구진은 또한 기억력 유지가 추위로 인해 세포막이 딱딱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세포막이 비정상적으로 단단한 돌연변이가 생긴 예쁜꼬마선충의 두 가지 균주는 상온에서도 정상 선충보다 망각 속도가 느려졌다. 실험 결과 세포막의 물리적 경화가 망각을 지연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는 기억이 어떻게 생성되고 소멸되는지에 대한 신비를 이야기한다. 또한 환경 조건에 따라 벌레의 기억의 예민함이 달라지는 이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레차비 교수는 “벌레들은 완벽하게 기억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데 왜 잊어버리는 걸까요?”라고 질문했다. “뭔가를 최적화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아마도 특정 기간 동안 추억을 간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충관계는 다른 동물에서도 발생할까?
레차비 교수의 연구진은 현재 ‘물곰’으로 알려진 아주 작은 완보동물과 특정 종류의 거북이와 같이 추운 온도에서 생존력이 강한 다른 유기체에서도 유사한 기억 현상이 발생하는지 조사하고 있다. “그 느림보 녀석들이 우리를 오랫동안 바쁘게 만들 것“이라고 레차비 교수는 말했다.
해당 논문은 다음 링크(https://doi.org/10.1101/2024.04.03.587909)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