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할 때 베이비오일을 써보기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사귀기로 한 지 꼬박 5년째 되는 날이었다. 권태롭던 섹스는 활기를 되찾았으나, 진수영(가명·31)씨는 머지않아 산부인과를 찾아야 했다. 팔다리에만 써야 할 오일을 ‘러브젤’로도 썼던 게 실수였다. 세균성 질염으로 항생제를 처방받고 나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마사지나 전희 단계에서만 썼어야 했는데,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니 삽입할 때도 써버린 거죠.” 뒤늦게 찾아본 오일의 성분은 당혹스러웠다. “석유화학물이 들어간 광물성 오일이었어요.”
최근 박윤아(가명·43)씨를 괴롭히는 것은 성교통이다. 애액(성관계 때 나오는 여성의 분비물)이 분비되지 않는 증상이 몇달째 그대로였다. 전희 시간을 늘려도 소용없었고, 호르몬제는 구역질이 나고 온몸이 붓는 등 부작용이 심했다. 결혼 15년 차인 박씨에게 부부관계는 이제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였다. “러브젤은……글쎄요. 좀 찜찜하달까요? 미세먼지니 환경호르몬이니 일상이 유해물질 소굴이잖아요. 굳이 예민한 부위에까지 화학성분을 바를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섹스 용품은 대체로 천대받는다. 민망하거나 부끄럽게 여겨지고, 구매는커녕 입에 담는 것조차 기피된다. 올바른 정보 없이 함부로 사용되는 일도 다반사다. 모든 인간은 누군가의 섹스 덕분에 태어나며 무성애자를 빼고는 누구나 섹스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런 현실은 이율배반적이다. 섹스용 윤활제, 일명 ‘러브젤’도 마찬가지다. ‘러브젤’ 하면 막연히 끈적끈적하고 야한 뭔가를 떠올리며 얼굴부터 붉히기 마련이지만, 생각해보라. 그 목적이나 성분, 사용법을 제대로 확인해본 적은 있었는가?
백과사전식 정의부터 살펴보자. 러브젤이 뭐냐고 묻는다면, ‘섹스할 때 쓰는 점성이 있는 액체’라고 답하겠다. 무슨 기능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생식기나 민감한 부위의 피부를 보호해주고, 쾌감을 높여준다’고 답하겠다. 어떤 원리냐고? 그야 뭐 간단하다. 미끈미끈한 젤의 성질이 접촉면의 마찰을 줄여주는 것이 원리다.
용도는 이성애자건 동성애자건 비슷하다. 삽입 단계에서 질이나 음경, 항문에 바르거나 전희를 주고받을 때 부위를 가리지 않고 바른다. 자위 행위나 유사 성행위, 섹스토이를 이용할 때도 쓰인다. 박윤아씨처럼 질이 건조해 성교통을 느끼는 여성들에게도 유용하다. 성관계를 원활하게 해줄 뿐 아니라 질 내부의 상처를 막아준다.
진수영씨처럼 몸에만 발라야 할 오일을 러브젤로 오용하는 건 두말할 필요 없이 유해하다. 점성이 있는 액체라고 해서 뭐든 러브젤인 건 아닌데도, 딴에는 ‘촉촉한 물질’이랍시고 러브젤로 오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를테면 바셀린, 마사지오일, 수분크림, 헤어젤 등이다. 몸에서 가장 푸대접받는 발도 풋크림과 팩으로 관리받는 시대건만, 한없이 소중한 생식기가 고작 이런 대우를 받다니. 곤란한 일이다. 바셀린이나 오일 같은 지용성 물질은 질이나 항문 내부로 들어가면 잘 씻겨 나오지도 않아 세균 번식을 부채질한다.
러브젤은 정부기관의 인증을 받되 생식기에 발라도 무방한 제품을 써야 한다. 종류는 크게 두 가지다. 약사법상 일반의약품이나 의약외품으로 분류되는 제품, 그리고 화장품법상 ‘마사지젤’로 분류되는 제품이다. 전자는 대장내시경이나 초음파 등에도 쓰는 외과용 젤리로, 유명한 제품으로는 아스트로글라이드겔, 루브겔, 루루그린서질겔, 가디언겔, 모이스겔, 트란스겔 등이 있다. 후자 중에는 아스트로글라이드오리지널, 이브젤, 샤이노모어 루브리컨트, 페페젤, 유니더스젤, 케이와이(KY)젤 등이 유명하다.
의약품으로 분류된 제품들은 일반의약품이라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고, 화장품으로 분류된 제품들은 인터넷 쇼핑몰이나 드러그스토어 체인 등에서 살 수 있다.
러브젤은 그 성질에 따라 수용성, 지용성, 실리콘베이스로도 나뉘는데, 콘돔으로 피임한다면 지용성 제품은 피해야 한다. ‘행복한성문화센터’ 소장인 차의과학대학 배정원 교수는 “유분과 콘돔의 라텍스는 상극이라 지용성 러브젤을 쓰면 콘돔이 찢어지기 쉽다”며 “여성의 질액과 비슷하고 세척이 쉬운 수용성 러브젤을 권한다”고 말했다. 또한 모든 러브젤은 콘돔을 씌운 뒤에 바르는 게 좋은데, 순서가 뒤바뀌면 콘돔과 성기의 접촉면이 미끌미끌해져 콘돔이 빠질 수 있어서다.
신경 써야 할 점은 이걸로 끝일까? 아니다. 또 있다. 성분이다. 앞서 언급한 제품은 모두 수용성이다. 수용성 러브젤은 여성의 질 안에 들어가더라도 금세 녹아 분비물로 배출되는 등 장점이 많으나, 보습력과 지속력을 높이려고 글리세린이 함유되는 게 단점이다. 글리세린은 질에 들어갔을 때 농도 차로 인한 삼투압 현상을 일으켜 오히려 질 내부를 건조하게 만들기 쉽다. 글리세린 함유량이 높은 러브젤은 질의 자정 능력을 파괴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비롯한 성병 감염률을 높인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연구결과도 있다.
대구코넬비뇨기과 이영진 전문의는 “글리세린 함유량이 높은 러브젤은 질 내부의 삼투압 농도를 높여 질을 느슨하게 만들고 상피조직을 손상시킨다”며 “질의 자연적인 삼투압 농도인 260~290오스몰(mOsm/kg)에 부합하는 제품이 좋은데, 글리세린 함유량만 봐서는 제품 자체의 삼투압 농도를 알 수 없으므로 가급적 글리세린이 적게 들어간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조언했다.
박윤아씨처럼 화학성분이 걱정되는 사람이라면 가급적 유기농 제품을 쓰거나 글리세린 함유량 말고도 글라이콜이나 파라벤 같은 성분의 포함 여부를 확인해보는 게 좋다. “첨가 성분에 따라 알레르기나 접촉성 피부염이 나타날 수 있고, 여성의 생식기관은 내부로 발달해 제대로 세척해낼 수 없기 때문에 제품에 표시된 전성분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섹슈얼 헬스케어 브랜드 ‘이브'의 박진아 공동대표의 말이다.